경상북도 칠곡군은 처음 이름만 들으면 좀 낯설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대구 근교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잘 몰랐다. 그런데 문득 지도를 보다 눈에 들어온 곳이 칠곡이었다. 뭐랄까, 붐비는 관광지가 아니어서 더 끌렸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은 특별할 것 없이, 그냥 조용히 걷고 싶었다. 사람 많고 정신없는 곳 말고, 좀 한적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그렇게 찾아간 칠곡에서, 나는 뜻밖에도 세 곳의 아주 인상적인 장소를 만났다. 그 풍경과 감정이 오래 남을 것 같아서, 이렇게 글로 남겨 본다.
기억 속으로 걸어들어간 시간 – 호국평화기념관
호국평화기념관은 이름만 보면 조금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전쟁, 군인, 역사… 왠지 무거운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실제로 그곳에 가서 걸어보면, 그 느낌이 좀 달라진다. 딱딱하다기보다, 묵직하다. 그냥 자료 몇 개 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념관은 생각보다 넓고, 분위기가 차분하다.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옛 전투 장면들이나 병사들의 일기가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어린 병사의 편지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엄마, 전 괜찮아요. 금방 끝날 거예요.” 그런 말이 써 있었다. 그 문장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냥 조용히 그 앞에 서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 친구가, 오빠가, 그렇게 전쟁터로 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내가 갔던 날은 평일 오후여서인지 사람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더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영상관도 있었는데, 실제 전투 상황을 재현한 영상은 무서울 만큼 현실적이었다. 정말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쟁이 뭔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밖으로 나와서도 한참을 걷게 된다. 전시된 탱크와 전투기, 그리고 조용히 앉을 수 있는 벤치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데, 그게 마치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숨결 같기도 했다. 나는 그날,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전쟁은 지나간 일이지만,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평화’라는 걸 말이다.
시장 골목 끝에서 만난 따뜻함 – 왜관시장과 낙동강변
호국평화기념관을 나와서 좀 걸어가면 왜관시장이라는 전통 시장이 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냥 잠깐 들러서 뭐 하나 사 먹고 가자 했던 정도였는데, 이곳은 의외로 정말 따뜻한 공간이었다. 시장은 언제나 그 지역 사람들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칠곡도 그랬다. 시장 안에는 좌판을 펼친 아주머니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반찬, 떡, 빵들이 가득했다. 나는 ‘찰보리빵’이라는 걸 처음 먹어봤는데, 와, 이게 그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빵인데도 너무 달지도 않고, 안에 있는 팥이 뭔가 집에서 만든 느낌이랄까. 진짜 맛있었다. 그 빵 하나 들고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걷는데, 옆 가게에서 “하나 더 먹어봐~” 하고 웃으며 말 건네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시장 바깥으로 나오면 바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철교도 있고, 그 옆에는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어서 걷기 딱 좋았다. 사실 이렇게 강 옆에서 걷는 게 정말 힐링이라는 걸, 이곳에서 다시 느꼈다. 그날따라 햇빛이 물 위에 반짝이고 있었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마저 다정하게 들렸다.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누군가는 연을 날리고 있었다. 참 평화로운 오후였다. 이곳에선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걷고, 쉬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낙동강변에서 혼자 오래 앉아 있었는데, 그러면서 묘하게 마음이 정리되는 걸 느꼈다. 서울에서 살다 보면 뭐든 빨라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고, 뭔가 늘 하고 있어야 하는데… 여긴 그렇지 않았다. 그냥 있어도 되는 공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런 곳. 그게 얼마나 귀한 건지, 칠곡에서 깨달았다.
고요한 숲길에서 만난 나 – 가산산성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가산산성이다. 산이라는 단어에 잠깐 망설였지만, 다행히 가산산성은 부담 없는 코스였다. 등산이라기보다 숲길 산책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나무들이 촘촘하게 둘러싸고 있었고, 발밑엔 낙엽이 부드럽게 깔려 있었다. 사람도 별로 없어서, 마치 숲 전체가 나만을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걸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돌담 하나하나를 지나치며, ‘여긴 어떤 사람들이 지켰을까’, ‘이 돌은 몇백 년을 버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성 자체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세월을 고스란히 견디고 지금도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중간중간에 쉼터도 있고, 나무 그늘도 많아서 오르기 참 좋았다. 바람도 시원했고, 나무 냄새도 좋았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칠곡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뿌듯했다. 뭐 대단한 산을 오른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려다보이는 풍경 속에, 내가 오늘 걸었던 모든 길들이 담긴 것 같았다. 아까 들렀던 시장도, 강변도, 그리고 이 산길도 전부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듯한 기분. 가산산성은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속엔 시간이 묻어 있고, 조용히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무 말 없이 걷고, 멈추고, 바라보고. 그렇게 보낸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이렇게 세 곳을 둘러보고 나니, 칠곡이 단순히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이야기들이 있고, 사람 냄새 나는 골목이 있으며, 마음을 가만히 내려놓을 수 있는 숲길이 있는 곳. 다음에 또 혼자만의 여행이 필요할 때, 나는 아마 다시 이곳을 찾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