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시가는 고대 부족 국가 시대부터 삼국 시대 초기까지 불린 시가입니다. 이 시가는 원시 종합 예술에서 발생한 시가로 서사와 시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집단 노동요, 의식요 위주로 창작되었고, 이후에는 개인적 서정 가요가 창작되었습니다. 주로 배경 설화와 함께 전해집니다. 기록 수단이 없어 구전되어 오다가 후대에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해집니다. 이 글에서는 고대 시가 공무도하가, 구지가, 황조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공무도하가
이 시가는 중국 문헌에 전하던 고조선의 노래를 조선 시대에 <해동역사>라는 책에 다시 한시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악공명에 따라 '공후인'이라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문학사상 가장 이른 시기의 시편 중 하나인 이 작품에는 사랑하는 임을 여읜 시적 화자의 애절한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시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물'의 이미지는 화자의 감정에 따라 변화하며 화자의 심리 상태를 대변합니다. 1구에서 '물'은 자연물이 아닌, 그것을 넘지 않기를 바라는 시적 화자의 사랑이 담겨 있는 소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구에서 '물'은 물을 건너 버린 임과 화자의 기약 없는 이별을 의미합니다.
배경 설화에 나타난 '머리가 하얀 지아비'의 모습이나 거동은 예사롭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신화적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신화적 질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둘째, 무당이라는 해석입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은 황홀경에 든 무당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고조선이 국자적인 체제를 확립하면서 무당의 지위가 상실되자 이에 좌절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이 작품은 집단 시가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고조선 시대의 노래로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시가입니다.
2. 구지가
이 작품은 <삼국유사> 가락국 건국 신화 속에 삽입되어 전하는 고대 시가입니다. 가락국의 군중이 임금을 맞이하기 위해 불렀던 노래로 영신국가에 해당됩니다. 본래 우리말로 불렀을 거라 생각되지만, 현재는 4구의 한역시가 형태로 전해집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흙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점에서 집단적인 성격이 있는 노동요입니다. 땅을 파는 연극적 행동과 춤, 노래가 함께 이루어진 장면을 통해 원시종합예술의 형태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실제 행동이 아닌 집단적 염원을 담은 언어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로 임금을 맞이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거북'과 '머리'의 상징적 의미는 현명한 군자의 출현과 풍년의 기원을 고대인들이 열망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지가'는 신라 성덕왕 때 해룡에게 끌려간 수로 부인을 구출하기 위해 불렀다는 '해가'의 가사, 뜻, 표현 형식 면에서 매우 유사합니다. 구지가가 40~50년경의 작품이라 본다면 '해가'는 그로부터 약 700년 후의 작품인에도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이는 이 시가가 오랫동안 구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 황조가
이 작품은 B.C.17년 유리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서정시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4언 4구의 한시로 번역되어 전해집니다. 매우 짧은 노래임에도 완벽하게 대칭적인 균형과 탄탄한 시상 전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사랑하던 짝을 떠나보내고 고독감과 슬픔을 자연물인 '꾀꼬리'를 매개로 하여 우의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짝을 이루어 노니는 꾀꼬리와 홀로 있는 사내, 정다움과 외로움, 가벼움과 무거움이 대립되고 중첩되면서 화자의 정서가 효과적으로 부각됩니다. 또한 자연물에 의지하여 시상을 일으킨 후 나중에 자신의 감회를 펴는 표현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문학상을 한층 높여 줍니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우리 시가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순수 서정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황조가'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서정시로 보는 입장과 서사시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서정시로 보는 견해는 유리왕이 지은 개인 서정시로 보는 경우와 구비 전승되는 서정 민요로 보는 경우로 나누어집니다. 서사시로 보는 견해에서는 이 작품을 부족 간의 통합 과정에서 나타난 집단의 갈등을 표현한 시가로 봅니다.
'황조가'의 작가로 알려진 유리왕은 신화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고난을 겪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연민과 외로움 등을 시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편의 고대 시가는 국문학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국문학사상 최초의 정형화된 서정시이고, 향가의 가사와 표기 형식은 신라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향가를 표기한 표기법인 '향찰'은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 발전시킨 것입니다.